송양지인의 교훈...인간적 연민과 군사적 판단은 별개
정전 73년에도 군사적 대치...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HBN뉴스 = 이동훈 기자] 북한군이 남침해 대한민국의 도시가 전쟁터로 변한다. 한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에 맞서 싸우고, 시민들은 생존의 위협에 내몰린다. 게임 속 가상의 전쟁이지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76년 전 이 땅에서는 실제로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벌어졌고,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는다.
23일 출시된 미국의 1인칭 슈팅 게임(FPS)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4’가 논쟁에 휩싸였다. 북한의 남침으로 제2차 한국전쟁이 벌어진다는 설정 때문이다. 이용자는 대한민국 국군 병사인 ‘박 이병’이 돼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 싸운다. 한미 연합군의 대응과 점령지 탈환도 주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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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일 군 합동조사반이 군사분계선(MDL) 이남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뢰를 폭파해 제거하고 있다. 군은 북한이 2024년 이후 비무장지대(DMZ) 일대에 약 96만 발의 지뢰를 매설한 것으로 추정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
그런데 정작 게임을 둘러싼 논쟁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북한군을 지나치게 잔혹하게 묘사했다거나 전쟁을 오락화했다는 비판이 나오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북한군 역시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며 동정하는 반응도 등장했다. 정치권까지 가세하면서 게임은 어느새 대북정책과 이념 논쟁의 소재가 됐다.
전쟁을 오락으로 소비하는 것이 적절한지 묻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이라는 설정을 두고 정치적 잣대부터 들이대는 모습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게임이 보여주는 상황이 현실이라면 가장 먼저 고통받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군인들만 서로 총을 겨누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도시가 파괴되고, 가족들이 흩어지며, 평범한 시민들이 피란길에 오른다. 게임에서는 죽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현실의 전쟁에는 그런 기회가 없다.
6·25전쟁은 그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수많은 민간인의 생명을 앗아갔고, 이산가족과 전쟁고아를 남겼다. 전쟁의 상처는 총성이 멈춘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경제적 피해 역시 참혹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6·25전쟁으로 남한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2%가 파괴됐다. 도로와 철도, 교량,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은 가뜩이나 빈약했던 대한민국의 생산 기반을 무너뜨리고 국민을 극심한 빈곤으로 내몰았다.
그 폐허 위에서 대한민국은 전후 복구와 산업화를 거쳐 다시 일어섰다. 박정희 정부 시기의 경제개발계획과 국민들의 땀과 희생, 기업들의 투자, 국제사회의 지원이 함께했다. 지금의 번영은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를 수십 년에 걸쳐 다시 세운 결과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전쟁이 아직 평화협정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것은 종전협정이 아니라 정전협정이었다. 남북은 지금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 6월에도 북한 정권과 북한군이 우리의 적이라는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주적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과 별개로 대한민국 군대가 대비해야 할 군사적 위협의 실체는 분명하다.
여기서 떠오르는 고사가 송양지인(宋襄之仁)이다.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 양공은 초나라 군대와 싸우면서 적군이 강을 건너는 도중 공격하자는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적이 강을 건너고 전열을 정비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송나라 군대는 패배했고 양공도 큰 부상을 입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송양지인이라 불렀다. 전쟁의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명분에만 집착하다 더 큰 화를 불러오는 어리석은 인정을 뜻한다.
물론 이 고사가 적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북한 주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존엄을 지닌 존재다. 북한군 병사 가운데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군에 동원된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생각해야 한다. 항복한 병사나 포로, 민간인에 대한 인도적 보호 역시 지켜야 할 원칙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침략에 대응하는 군사적 판단은 별개의 문제다. 남침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북한군의 처지를 먼저 동정하는 태도가 침략의 책임과 방어의 필요성을 흐려서는 안 된다.
평화를 추구하는 것과 군사적 위협을 직시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위협을 정확히 인식하고 대비할 때 평화를 지킬 기반도 마련된다.
이번 게임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 태도 역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한다며 게임을 비판하는 것도, 반대로 게임을 특정 정치세력의 대북정책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도 작품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
게임 제작진은 한국의 군 생활과 문화, 언어 등을 구현하기 위해 관련 자료와 한국계 직원들의 경험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한반도 편은 북한의 침공에 맞서 한국군이 싸우는 이야기다. 이 설정 자체를 특정한 정치적 의도의 산물로 단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창작의 자유는 존중받아야 한다. 게임의 역사적 고증과 전쟁 묘사가 적절한지는 작품의 실제 내용을 놓고 평가하면 된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이나 이념적 신념을 앞세워 북한의 남침이라는 역사적 현실까지 흐리게 해서는 곤란하다. 정권에 따라 ‘반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어려워지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이유도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단순한 게임의 배경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가족의 비극이며, 우리 사회에는 현재진행형인 안보의 문제다.
송양지인의 교훈은 전쟁에서 인정을 버리라는 데 있지 않다. 인정과 현실을 혼동하지 말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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