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선생' 진위대장→교육자→독립운동가의 길…"서울로 도피한 유명 일화 뭐길래?"

박경태 / 기사승인 : 2019-07-25 08:5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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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 일대기 정리
▲(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MBC )

'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의 업적과 일대기가 화제다. 

'7월의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선생은 1873년 빈농의 아들로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출생했다. 부친 이승교가 아들 이동휘 선생을 아전으로 출세시키고자 단천군수의 통인으로 주선했지만 정작 이동휘 선생은 군수가 자신의 생일에 어린 기생들에게 저지르는 추행을 보다 못해 화로를 군수에게 던졌고 사건 후 이동휘 선생은 서울로 도피했다. 

이후 '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은 사관양성소에 입학, 이후 강화도에 진위대장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이동휘 선생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군직을 사임한다. 나라를 교육운동으로 극복하기 위해 교육자로 변신한 것. 이동휘 선생은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했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이에 대항한 강화도 군민들이 봉기하자 이동휘 선생이 그 배후 조종자로 일제에 체포됐다가 4개월 후에 석방됐다. 석방된 후 이동휘 선생은 서북학회와 비밀결사단체인 시민회를 통해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아울러 이동휘 선생은 기독교 신자가 돼  기독교 전도활동에도 힘썼다.  

한일합병 후에는 일제에 체포되어 인천 앞바다에 있는 대무의도에서 1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였으며, 유배에서 해제 된 ‘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은 1913년 압록강을 건너 만주 북간도로 탈출했다. 북간도에서 이동휘는 한인자치 기관인 간민회를 지도하면서 신교육보급과 기독교 전도활동, 기독교 전도활동, 동포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은 △1914년 만주에 항일광복을 위한 사관학교 설립 및 광복전쟁계획을 수립과 총지휘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당 △1919년 11월 3일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 취임 △1921년 5월 고려공산당 창당 등의 업적을 남겼다. 이동휘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고통 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돕다가 블라디보스톡으로 귀환 도중 심한 독감으로 1935년 1월 31일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과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한편, 누리꾼들은 ‘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의 업적에 대해 “정말 청렴하신 분” “강화도인가 봤다가 이분 설명 봤는데 정말 대단하시구나” “우리나라 역사는 읽어도 읽어도 마음이 뜨거워진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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